피노 누아(Pinot Noir)는 부르고뉴를 대표하는 품종이다.
재배가 어려운 품종이며 기후에도 굉장히 민감해 대량생산이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껍질이 얇아 햇빛이 좋은 환경만으론 부족하다. 낮동안의 열기를 식혀줄 차가운 밤공기 또한 필요로 하는 까다로운 녀석이란다.
수용자 입장에서도 피노누아는 어려운 품종이다. 일단 비싸다. 생육조건과 재배 여건에 따른 희소성이 가격에 반영되는 탓이다. 보관 및 숙성도 타 품종에 비해 어렵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피노누아는 와인의 종착지로 여겨진다. 고수들이 좋아하는 품종이라는 야그다.
부르고뉴로 시작하는 건 언감생심일터... 그래서 택한 게 가격과 테이스팅 모두에서 비교적 부담이 덜한 미국 오레곤 주 피노누아다.
물론 오레건 피노누아도 상당한 공력을 자랑하는 탓에 꽤 비싼 게 사실이다. 최고로 꼽히는 보 프레레(Beaux Freres Vineyards) 피노누아의 경우 70달러 정도 가격에 와인 스펙테이터 등의 평가 점수 또한 90점을 상회한다.
내가 첫경험의 파트너로 택한 녀석은 얼마 전 코스트코에서 집어 온 Kirkland Signature 오레곤 피노누아 2005. 가격은 24,900원으로 착한 편에 속한다. 알다시피 커클랜드는 코스트코의 Private Brand인데 와인까지도 PB상품을 출시해 좀 신선했다.
라벨의 설명에 따르면, Willamette Valley, Applegate Valley, Rogue Valley 등의 오레건 지역 소규모 밭에서 나온 피노누아를 모아 만들었단다. 그리고 2005 빈티지의 경우 예년에 비해 훌륭하다는 자평을 늘어 놓는다. 버티컬 테스팅을 해보지 않았으니 뻥인지 어쩐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ㅎㅎ
서설이 길었는데... 한 마디로 대만족이었다.
부르고뉴 특유의 숙성된 맛 같은 건 먹어 보지 않은 내가 봐도 눈꼽만끔도 없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뭐 부르고뉴가 꼭 기준일 필요가 있나. 신세계는 신세계 다운 매력과 비전을 제시하고 그것이 설득력이 있으면 그만 아닌가. 부르고뉴는 부르고뉴고 신세계는 신세계다. 삼겹살집 가서 발레 파킹 안된다고 성내는 녀석이야말로 웃기는 짬뽕 아닌가. 그런 면에서 이 녀석은 분명히 성공작이라 할 만하다.
우선 눈이 즐겁다. 병목의 호일이 짙은 핑크빛인데... 그냥 볼 때는 촌스럽다고 생각했으나 와인을 잔에 따르며 흘러내리는 와인의 빛깔과 핑크빛 호일의 일체감이 굉장히 아름답게 느껴졌다. 연한 루비빛은 굉장히 맑고 투명한 느낌이다.
향과 색의 조화 또한 인상적이다. 진한 딸기향이 솔솔 풍겨나오는데 신선함과 농익음이라는 이율배반이 그 순간 버젓히 성립되고 있었다.
상당히 가벼울 거라 생각했는데 맛도 생각보다 균형잡혀 있는 느낌이다. 산미가 튀는 것도 아니고 그저 상큼할 뿐이며 언뜻 느껴지는 달콤함도 알콜기운에 녹아들어 적당히 드러날 듯 말 듯 조심스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처음 피노누아를 접하고서는 실망했다는 분들이 꽤 많다. 대부분 곧바로 부르고뉴를 드시지 않았나 싶은데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오레건 쪽의 이처럼 저렴한 피노누아가 입문용으로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봤다. 이 부분은 며칠 후 부르고뉴 한 병을 따 보면 어느 정도는 확실해지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