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에 젖은 오클랜드는 예상 밖의 초라한 몰골로 나를 맞았다. 다소 김이 샜다. 하필 도착 첫날부터 추적추적 비라니…
이 도시는 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도시다. 꾸물거리는 하늘도 마찬가지다. 오직 파란하늘에 뭉게구름만이 이 도시의 정체성을 제대로 드러내는 단조로운 미장센인 셈이다.
입국장을 나서니 살짝 막막하다. 맞아 줄 이가 있는 사람들은 좋겠구나. 픽업 차량의 행렬에 괜히 셈이 난다. 약간의 현지 시장조사를 마치고 당초 예약한 AVIS 데스크로 향했다. 로컬업체들은 좀 더 싼 가격을 제시하는 듯 했으나 선뜻 신뢰가 가지 않았다.
내가 예약한 차량은 도요타의 스테디셀링 모델인 캠리. 배기량이 내차와 같은 2400CC다. 좋은 비교의 기회가 되겠다 싶어 캠리를 골랐다. 코롤라 같은 소형 모델과의 가격 차가 거의 없다는 점 또한 캠리를 선택케 한 요인이었다.
데스크에서 키를 받아 주차장으로 향했다. 나를 상대한 스탭은 중국계 현지인이었는데 처음부터 수월치가 않다. 생각했던 것보다 발음이 더 영국식이고 말의 속도 또한 빨랐다. 관광으로 먹고 사는 나라이니 웬만큼 친절들 하겠지 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오히려 다들 심드렁한 표정들이다. 주요 렌터카 업체들의 차량 픽업 주차장은 공항건물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어 매우 편리했다. 그런데 맙소사~ 차량 색상이 내가 젤 싫어하는 자주색이었다. 인터넷 예약 화면에 자주색 모델이 나와 있어 설마 했는데 진짜로 그랬던 게다. 아무리 렌터카라지만 우아한 실버나 깨끗한 화이트였다면 더 좋았을 것을.
첫 행선지는 공항 근처에 위치한 빌라 마리아의 오클랜드 와이너리. 주차장에서 만난 친절한 아저씨가 어떻게 공항을 빠져나가 빌라 마리아 쪽으로 가야 할 지를 알려주어 마음이 좀 놓였다. 빌라 마리아는 정말로 가까웠다. 차로 10여분쯤 떨어진 거리. 찾기도 쉬웠다. 매번 느끼는 바이지만 거리 주소 체계가 여러 모로 효율적인 것 같다. 우리 나라도 조만간 바뀐다니 앞으로 네비게이션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좋을 지 모른다.
빌라 마리아의 오클랜드 농장은 예상 밖으로 꽤 큰 규모다. 관광객을 의식해 연락사무소 형식으로 셀라 숍을 운영하는 게 아닐까 의구심을 품었는데 기우에 불과했다. 노랗게 변한 포도 잎사귀들이 파란 잔디 위로 넓게 펼쳐져 있다. 수확 직후라 잘 영근 포도 열매를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노랗게 변한 포도밭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이 설렜다.
빌라 마리아는 Montana, Church Road 등과 함께 뉴질랜드 메이저 와인 메이커 중 하나로 꼽힌다. 우리 나라에서도 아마 가장 많이 알려진 뉴질랜드 와인이 아닐까 싶다. 1961년 George Fistonich가 설립했고 설립자와 회사 모두 국제적으로 꽤 인정을 얻고 있다. 또 Vidal, ESK 같은 브랜드 또한 소유하고 있는 엄브렐러 브랜드이기도 하다.
빌라 마리아에서는 총 10종의 와인을 시음했다. 얘들 와인 체계는 프라이빗 빈<셀라 셀렉션<리저브<싱글빈야드 등으로 등급화 되어 있고 싱글 빈야드는 밭단위, 리저브는 마을 단위로 생각하면 무난할 듯 하다. 싱글 빈야드는 중에서는 말보로 Seddon 빈야드에서 만든 피노누아를 마셨는데 걍 괜찮은 정도… 특별한 감흥은 느끼지 못했다. 인상적이었던 와인은 쉬라와 게뷔르츠트라미너였는데 둘 다 굉장히 스파이시 했다. 다니면서 보니 어느 와이너리나 얘들 둘은 꼭 만드는데 다들 인상이 비슷비슷했다. 요즘 이쪽의 트렌드인 모양이었다. 어쨌든 빌라 마리아에서는 게뷔르츠트라미너의 스파이시하면서 플로럴한 아로마가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정작 구매는 리슬링 귀부(botrytis)와인을 구매했다^^ 가벼워 보여서. 근데 이게 사실 상 이곳에서 가장 비싼 와인 중 하나다. 375에 40불 정도니 750ml로 환산시 80불!
와인구매까지 마친 후 소믈리에에게 근처에서 편하게 갈만한 골프장이 있는 지 추천을 구했고 와이너리를 나와 그가 알려준 골프장으로 향했다. 빌라 마리아에서 20분쯤 떨어져 있고 오클랜드 시티 중심부에서는 1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Chamberlain 골프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소박했다.
거의 수퍼마켓 수준이다. 프로숍과 프론트가 함께 있는 구조였는데 그린피를 계산하고 나니 영수증 하나만 딸랑 주고 끝이다.
나: 언제 나가믄 되니? 내 티업 타임은 언제야?
직원: 그런거 없거... 니 꼴리는대로 암 때나 나가믄 돼...
나: 그... 그래... 그런거였구나... 고마버...
일일(한 라운드가 아닌 하루!) 이용요금은 24불. 우리 돈으로 17천원 정도! 소박함을 넘어 누추하기까지 한 클럽하우스와 상상을 초월하는 저렴한 가격은 일말의 불안함마저 가지게 했다. 코스 관리가 제대로 돼 있을까. 사람이 미어터지지는 않을까. 이러한 걱정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
한국의 코스들처럼 잘 정돈돼 있지는 않았으나 잔디는 조밀했고 한산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페어웨이 주변을 둘러싼 거목들은 고즈넉한 느낌을 연출하며 코스의 연륜을 가늠케 했다. 1번 홀 티박스에 섰는데 다소 긴장이 됐다. 허둥지둥 온 것도 그렇고 처음 경험하는 외국 코스에서 느껴지는 낯설음, 거기에다 캐디까지 보통 네 명의 갤러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티 박스에 서곤 했던 내게 혼자 하는 골프는 야릇한 고독감까지 불러 일으킬 정도였다.
파4 285m 비교적 짧은 첫 홀. 이런 저런 낯설음을 이기고 기분 좋게 파로 출발, 세컨샷 미스로 세번째 샷에서야 그린에 올렸으나 핀에 가까이 붙이고 1펏으로 마무리. 그런데 그린을 깍아주지 않아 그린 스피드가 현저히 느리다. 비가 와서 그런지 엄청 말랑말랑해 그린에 떨어진 공이 퍽퍽 묻힐 정도다. 이게 한계인가 보다.
두번째 홀부터는 싱가포르에서 온 여행객 부부와 조인을 하게 됐고 10번 홀부터는 중국계 현지인도 달라 붙었다. 한 중 대결인 셈이다 ㅋㅋ. 그런데 여기서 치는 내내 이런 식이었다. 혼자 라운드 하다 보니 정말 인터내셔널하게 구성된 동반자들과 라운딩을 함께 하게 됐다^^
겨울로 접어드는 시즌이라 순식간에 어둠이 짙게 깔린다. 결국 막판 2홀은 포기. 그래도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골프장을 빠져 나와 시내로 향하는데 어둠은 완전 짙어졌고 그쳤던 비까지 두둑거린다. 초행길의 객에게는 무척 난감한 상황이다. 그래도 꿋꿋이 지도를 힐끔거리며… 정반대의 진행방향(얘들은 아시다시피 운전석이 우측이고 좌측주행이다)과 낯선 신호체계에 긴장하며 꾸역꾸역 시내로 향했다. 설상가상 시내중심가엔 일방통행로가 많다. 겨우 숙소를 잡고 다시 차를 몰고 나와 동생이 일하는 곳을 찾아 나선다. 처음엔 막막했으나 다녀 보니 꽤 찾기 쉬운 구조다.
혼자서 하루 종일 와이너리도 가고 골프도 치며 다녔다고 하니 사람들이 꽤나 황당해 한다. 초행인 주제에 빨빨거리고 다닌 꼬라지 하고는… 뭐 이런 물건이 있나 하는 눈치다. 허나 이 사람들아 그게 여행이다. 낯설음과 공포에 자기를 맡기는 것… 거기서 오는 실수와 불편마저 즐기는 것! 그게 바로 여행의 묘미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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