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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먼 발치에서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정현종 시인은 모든 이유를 행간 깊숙이 감춘 채 단 두 줄의 시구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나도 그 섬에 가고 싶었다.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는 허무개그식의 명언을 남긴 산악인 조지 말로리 식으로 말하자면 “와이너리가 거기 있으니까…” 오클랜드에서 북동쪽으로 14KM 떨어져 있는 와이헤케 섬은 관광명소이자 개성 있는 와인들이 생산되는 와인 산지로 알려져 있다. 허나 섬으로 향하면서도 의구심은 떠나지 않는다. 손바닥만한 섬에서 와인을 만들면 얼마나 만든단 말인가. 걍 관광객 유치를 위해 포도나무 몇 개 심어 놓고 쇼 하는 건 아닐까. 더욱이 비마저 내 속을 긁어 놓고 있었다. 전날 동생과 늦게까지 와인을 마시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던 게다. 파란하늘과 청명한 가을 날씨를 만끽하러 먼 길을 달려 온 내게 이틀 연속 내리는 비는 가혹한 형벌로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전날 마신 와인은 펜 폴즈 카베르네 메를로 였다. 가격이 착했다. 우리 돈으로 1만원대 초반. 시중에서 파는 와인은 대개 자국산 아니면 호주산이었는데 외려 호주산이 더 많은 듯 했다. 또 대량생산이 가능해서인지 호주산이 가격이 대체로 낮았다. 밤에는 이제 호주산 와인을 마시기로 작정했다. 원래는 차를 가져가서 섬 전체를 돌아보려는 계획이었다. 우리 서해안쪽에도 차를 페리에 싣고 입도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가서 차를 또 빌리느니 운임이 좀 비싸도 그게 낫겠다 싶었는데… 선착장에서 운임을 확인하는 순간 계획은 수정되어야 했다. 이번 여정 내내 차를 빌리는 비용에 버금가는 엄청난 운임… 고작 30~40분 떨어져 있다면서 너무한 거 아닌가 싶었다. 10시 배는 포기하고 파킹할 장소부터 찾았다. 선착장 근처 브리또마트역 주차장을 이용하기로 했다. 여기 주차장은 무인 주차장으로 차를 주차시킨 후 자기가 머물 시간 동안의 돈을 자판기에 넣고 기계에서 나오는 티켓을 받아 대시보드 위에 얹어 놓으면 된다. 티켓이 없는 차는 견인해 간다고 한다. 얘들은 인구도 별로 없고 차량 수도 우리에 비하면 읍내 수준인 것 같은데 주차 문제에 있어서는 살벌하기 그지 없다. 어디를 가든 ‘TOW AWAY’, 견인하겠음 이라는 경고문이 도배돼 있다. 서울의 주차전쟁을 이기며 살아 온 나로서는 이 사람들의 호들갑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나저나 이날 주차는 공짜로 했다! 운이 좋았다. 기계가 고장이 나 돈도 토해내고 티켓도 뱉어내지 않는 거였다. 우리 바로 앞에 벤츠를 몰고 온 키위 아자씨가 어떻게 대처하나 보니 궁시렁거리며 뭔가 메모를 적어 대시보드에 놓고 걍 가는 게 아닌가. 나도 잽싸 따라했다. “지금 10시 40분인데, 너네 기계가 맛이 간 모양이야. 나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돈 주려고 엄청 시도했는데 티켓이 안 나와. 나는 아마도 4시쯤 올 거 같으니까 그 사이에 절대 견인하지 말고 돈 받고 싶으면 그 때 이야기해.” 그러나 결국 내가 돌아 온 시간은 다섯 시였다. 설마 이 매정한 넘들이 4시에 진짜 기다리다가 차를 견인해 갔을까 다소 긴장했는데 다행히도 차는 얌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결론적으로 시간당 4불 정도의 비싼 주차비를 아낄 수 있었다 ^^v 페리에서 바라 본 오클랜드 시티는 날씨 탓인지 몰라도 조금은 가짜 같다. 스카이 타워를 중심으로 한 스카이 라인은 위용이 있다고 보기엔 좀 초라하고 간결하다고 보기엔 너무 조잡스럽다. 얼핏 보기엔 구룡반도 쪽에서 바라 본 홍콩섬 같기도 하지만 뱅크 오브 차이나와 HSBC 등의 유서 깊은 마천루들이 만들어내는 홍콩의 다이내믹한 스카이 라인에 비해 무척이나 왜소한 풍경이다. 데븐포트라는 곳을 들러 가느라 50여분이 지나 와이헤케 섬에 닻을 내릴 수 있었다. 월요일에다 날씨마저 꾸리꾸리한데도 페리는 만원이다. 사람마저 적었으면 얼마나 쓸쓸했을까 생각하니 그나마 다행이지 싶다. 페리에서 내려 우리는 터벅 터벅 걸음을 옮겼다. 처음부터 줄곧 걸어갈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목적지인 머드브릭(Mudbrick) 와이너리까지 걷게 됐다. 경사진 산길이라 조금은 숨이 가빴다. 길 양 옆으로 펼쳐진 경치는 인상적이었으나 그럴수록 웬수 같은 날씨만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허나 보슬비가 만들어내는 호젓한 분위기에 나름 적응이 되고 나니 이 또한 나쁘지 않았다. 빗방울을 머금어 더 또렷한 색을 드러내는 푸른 초원은 파란하늘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했고 단 한 치의 공백도 없이 하늘을 가득 메운 얄궂은 구름 너머로 내가 떠나기 전 언젠가는 나와 대면하게 될 쪽빛 하늘이 있다고 생각하니 그 또한 그럭저럭 위안이 됐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 새 길 옆으로 포도밭의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벌써 다 왔나 했는데 알고 보니 또 다른 와이너리인 케이블 베이(Cable Bay)다. 이 자그마한 섬에 10여 곳의 와인농장이 있다고 한다. 거기서 좀 더 걸으니 드디어 머드브릭 간판이 보인다. 머드브릭은 92년 설립됐다고 한다. 보르도 스타일의 전통적인 품종을 생산하고 전 과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하며 따라서 생산량 또한 (정확한 수치는 잊었지만) 무척 적다고 한다. 일반적인 유통망은 이용하지 않는 듯 했다. 와인도 와인이지만 머드브릭은 레스토랑으로 명성을 얻은 곳이기도 하다. 막상 보니 가히 명불허전이다. 아기자기한 꾸밈새도 볼거리지만 탁 트인 시야로 들어오는 해안가의 풍경이 정말 일품이다. 날씨 좋은 날 멋스럽게 세팅된 테이블과 라탄의자에 앉아… 눈 앞에서 붉게 타들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레스토랑의 오너가 직접 만든 와인을 음미하면 정말 환상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마구 들었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있으므로 우리는 일단 안쪽으로 향한다 ㅠ.ㅠ 이 섬의 또 다른 특산품인 올리브를 곁들인 빵과 연어 샐러드 그리고 뉴질랜드 소고기 블랙 앵거스로 만든 안심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와인은 2005 피노누아와 2005 까베르네 멀롯 각 한 잔씩. 피노는 걍 기분 좋은 정도였으나 까-멜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페퍼향이 코를 톡 쏘는 듯한 강렬함과 밀키한 부드러움이 묘한 공존을 이루고 있었다. (순서가 좀 바뀌긴 했는데…) 식사 후 셀러 샵에 가서 테이스팅을 해보니 이게 얘들의 주력제품인 듯 했다. 03년 04년 05년을 버티컬로 테이스팅했으나 빈티지에 따른 미묘한 차이까지 캐취하기엔 내공이 너무나 부족했다 ㅠ.ㅠ 샤도네이에서 민트향이 강하게 났던 것 또한 인상적이었다.
오일 소스가 눅진하게 버무려진 느끼한 스파게티에 상큼하기 그지 없는 쇼비뇽 블랑을 곁들일 생각이었다. 헌데 이 놈들… 자기들은 풀 라이센스를 가진 업소라면서 주류 반입이 안 된단다. 와인리스트를 보니 소매가에 비해 가격이 과한 편이고 내가 찾는 오일소스 스파게티도 없다. 그렇게 실망감을 안고 글로소 끼안띠 2잔과 토마토 소스 해물 스파게티 하나, 리조또 하나, 계절 야채 한 접시, 갈릭 브래드 등을 주문했다. 음식을 기다리며 동생에게 궁시렁댔다. 뭐 이렇게 치사한 놈들이 있냐고… 헌데 섭섭한 마음은 첫번째로 나온 갈릭 브레드를 맛보고는 싹 가셨다. 조각 피자 같은 모양을 하고 있고 토핑 대신 마늘 양념이 보기 좋은 브라운색으로 살짝 눌러 붙어 있는 마늘빵의 맛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짭쪼롬하고 고소하기 그지 없는, 사정 없이 식욕을 자극하는 맛. 스타터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첫인상에서의 실망감은 이내 자취를 감추고 메인요리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잠시 후 나온 스파게티와 리조또 모두 양이 풍성하다. 쟁반만한 접시에 그야말로 한 가득이다. 양이 많아 일단 또 좋았는데… 정작 맛은 별로다. 스타터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그랬는지 동생도 나도 반 조금 넘게 먹고선 나가 떨어졌다. 간만에 마신 비노는 오세아니아 와인에 쩔은 미각쇄신용으로 적당했다.
이 때부터 아타랑기와 드라이리버를 찾기 위한 나의 지난한 노력은 계속되었으나 결국 아타랑기 쇼비뇽 블랑 한 병을 구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 마지막 날까지 이어졌다. 물론 떠나는 날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반전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아타랑기가 있었거나 말았거나 이렇게 둘째 날도 훌쩍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내일마저 비가 내린다면 정말 우울한 여행이 될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에 휩싸이며 쓸쓸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몰라도 되고 알면 좋은 몇 가지 정보들]
1. 대한항공 오세아니아 노선의 기내 와인은 호주산 로즈 마운트다. 레드는 까쇼/메를로, 화이트는 샤도네이/세미용
현지에서 보니 로즈마운트는 제이콤크릭 보다는 비싸고 린드만이나 펜폴드 보다는 싼 가격의 와인
지난 2월 푸켓에 다녀올 때는 기내와인이 마주앙이었던 것 같은데...
마주앙보다 로즈마운트가 나았다.
2. 오클랜드에서의 주차... 가로변 주차가 가능하고 일반 주차장 보다 다소 저렴하다. 물론 구획 내에만 주차해야 한다.
좋은 점은 저녁 6시부터 아침 8시까지는 무료주차 가능. 이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런데 그만큼 좋은 자리는 맡기가 어렵다.
낮 시간에는 돈을 내면 되지만 그마저도 한 시간 이상은 안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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