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밤을 꼬박 새웠네요...
간밤에 지난 한 달여 간 마신 와인 리스트를 정리하고 나서(무척 많더군요!)
알랭 드 보통의 신작을 읽다가 문득, 기억 저편에 두고 온 와인들이 떠올랐습니다. (읽던 책에 '기억'이란 말이 유독 많이 나왔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하여 세월이라는 커튼에 휩싸여 보일 듯 말 듯한 기억의 편린들을 찾아내고 모으느라 얼마 간을 낑낑 거렸네요.
처음 와인을 마신 게 언제였더라... 건 도무지 기억이 안나더군요...
진로 포도주나 집에서 담근 포도주 말고 와인 다운 와인을 첨 마셔 본 게 언제였는지... 이제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조금은 서글프고 섭섭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걸 보면 '신의 물방울' 주인공 시즈쿠의 기억력은 거의 신의 기억력이라고나 할까요 ㅠ.ㅠ)
어쨌거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와인 중 첫번째는 대학교 2학년 때 마신 와인입니다. 96년... 그러고 보니 10년도 넘었군요.
여자친구의 생일이었는지, 100일 기념일 같은 이벤트 였는 지는 불분명합니다. 어쨌거나 여자친구를 위해 뭔가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주머니 속에는 딸랑 만원이 있었지요... 그래도 일단은 백화점으로 향했습니다. 학교 앞 백화점을 어슬렁거리는데 그때 눈에 들어온 행사 안내 문구... 9900원짜리 와인을 사면 글라스 하나를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샀습니다. 와인과 잔 그리고 거스름돈 100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점원에게 매달렸습니다. 잔 하나 더 달라고... 이왕이면 스크루도 하나 끼워 달라고...
그리하여 재생 크래프트 봉투에 담긴 와인 한병과 글래스 두 개를 들고 여자친구를 만나러 갔습니다. 여친이 사주는 밥을 먹은 후 여친이 다니던 학교 잔디밭으로 가서 봉투를 열고 와인을 꺼내고, 식당 화장실에서 물로 헹궈놓았던 잔을 꺼냈습니다. 서툰 몸짓으로 코르크 마개를 따고 잔을 채우며 눈치를 보니 꽤나 감격하는 모습...
여기까지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녀랑은 6개월 정도 더 만나다 헤어졌습니다.
그날의 와인이 어떤 와인이었는지, 향은 어땠고 맛은 어땠는지 정말 하나도 기억나질 않습니다. (레드였다는 사실 하나만...)
다만 와인이 모면케 해 준 위기, 그로 인한 반전과 몽연했던 분위기의 단편만이 지우다 만 흔적처럼 남아 있을 뿐이지요...
그 이후에는 꽤나 많은 와인을 마신 것 같습니다. 2학년 여름방학 때 호주여행 가서 와이너리도 방문했었고, 3학년 여름에는 프랑스에도 갔으니까요...
호주에서 마신 와인은 농장 방문했을 때 엄청나게 큰 스테이크와 함께 서빙됐던 와인이 있었다는 것 정도만 기억에 남아 있고. 프랑스에서는 스크류 마개인 6병들이 싸구려 와인을 사서 친구들과 함께 세느강변에서 밤 새 마셨던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아 그때 와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여행비를 아껴서라도 딸보 정도는 마셔봤을 텐데 말입니다^^
와인이름 까지 어느 정도 기억에 남아 있는 첫번째 와인은 샤또 다가삭(Ch' d'Agassac) 입니다.
지금 와이프와 연애하던 시절 청담동의 와인바 까사 델 비노에서 마셨지요. 2001년 무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때만 해도 와인바가 많지 않았고, 까사 델 비노가 쬐금 유명한 축에 속했지요. 그래서 거길 찾았고 서빙하시는 분에게 추천 받은 와인이 바로 다가삭이었습니다.
얼마 전 검색해 보니 오메독 지역의 크뤼 부르주아 라고 하네요... 조만간 한 병 사서 아내와 마셔 볼 참입니다.
결혼 첫 해 크리스마스 이브 때도 압구정동 원스 인 어 블루문에서 식사와 와인을 함께 했었는데 때가 대목이라 비쌌던대다가
운전까지 해야 해서 글라스 와인을 주문한 기억이 납니다. 지금 같았으면 글라스 와인일지라도 어떤 와인인지 분명 확인을 했을 텐데... 그때는 와인보다는 요리에 관심이 더 많았던 지극히 '정상'적인 시절이었지요 ^^
그러고보니 기억에 남아 있는 첫번째 화이트는 2000년 제주도 여행때 마신 마주앙(마주왕 아님 ㅋㅋ) 모젤 이네요.
이때도 지금의 아내와 함께였는데... 어느 일식집에 들어가 사시미 정식을 시켰는데 저렴한 가격인데도 너무 음식이 훌륭해 문득 와인이 땡기더군요... 마친 그 집에 팔던 화이트가 마주앙 모젤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리슬링 기반의 마주앙 모젤과 회가 썩 훌륭한 마리아주는 아니었을텐데도 그 날의 인상은 대단했고 이 때부터 화이트도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아 있는 또 다른 화이트는 사실 오래된 사진 속에서 찾아낸 것입니다.
병 모양을 보니 저것도 마주앙 인 것 같습니다^^ 이 때 뭘 알았겠습니까... 마주앙이면 오케이고, 마주앙 메독이면 감지덕지였지요.
이 사진은 신혼 초기 것으로 이 때만 해도 거의 2주에 한번은 아내가 특별요리를 만들어 주곤 했었지요....
왼편 사진에는 까르보나라에 레드의 조합이네요... 아마 저 레드는 마주앙 메독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밖에도 한 때 유행에 휩쓸려 보졸레 누보를 괜히 비싼 가격에 사서 마신 적도 있고, 결혼 후엔 마트엘 가면 꼭 와인코너를 어슬렁 거렸지만 본격적으로 와인을 데일리하게 즐기게 된 건 바로 이 녀석을 만나면서 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지금도 애용하고 계시는 하디스의 5리터 들이 팩 와인...
2005년 연초였을겝니다. 와이프의 지도교수님 댁에 새배드리러 갔는데 그날 손님들을 위해 그 집에서 내놓은 와인이 요놈이었습니다.
첫 인상은 별로였으나 마셔보니 그럴 듯 하더군요... 그 직후에 코**코에 가서 5리터 짜리를 무려 4팩이나 사고,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스모크드 치즈 역시 10개인가를 대량구매 했지요... 이걸로 일년을 버텨 볼 생각이었습니다.
결국 1년 걸리더군요... 총 20리터를 다 마시게 되기까지... 나중엔 화이트가 너무 마시고 싶어서 같은 메이커 샤도네이 5리터 짜리 한 팩을 사올 정도로 물리게 되더군요... 지금 다시 하라면 절대 못하지만... 팩 2개째까지는 정말 너무 행복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와인을 마시더라도 인식하면서 마신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행위인가를 절감하게 됩니다.
'(일반명사)와인을 마신다는 것'과 '(특정)와인을 마신다는 것'의 차이가 와인만큼 두드러지는 음료도 없을 테니까요...
기억의 셀러를 한참 헤매고 나서 얻은 결론은 이겁니다. 앞으로도 와인들과 함께 좋은 추억을 만들어 가자는 것!
결국 남는 건 사연과 사람과 와인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된다는 것.
제 기억의 셀러에 오래오래~ 남고 싶은 분들께서는 언제든 셀러 문을 두드려 주시라~
(모 와인동호회에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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