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키 요시오의 단편 <9월의 4분의 1>은 실존적인 사랑을 다루는 작품이다.
저자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언급하며 자신이 겪은 실존적인 사랑의 기억을 풀어낸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예컨대 지우개는 애초부터 뭔가 지우기 위한 물건이라는 목적을 갖고 만들어지며, 그 목적에 부합하는 기능과 특징을 가지게끔 설계되어진다. 이런 사물을 우리는 존재라 칭한다.
반면 목적도 목표도 없이, 따라서 치밀한 설계 없이 세상에 던져지는 인간 존재는 그야말로 실존적이다. 조물주가 부여한 소명과 그의 설계를 신봉하는 종교인들의 견해는 이와 궤를 달리하겠지만, 어쨌건 사르트르에게 실존은 텅빈 자유와 주체성을 핵심으로 한다. 아무 목적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인간 실존에 대한 통찰은 하이데거의 피투(被投) 개념과 맥락을 같이 한다.
어쨌거나 사르트르의 실존을 바탕으로 저자는 자신이 경험했던 사랑을 '실존주의적인 사랑'으로 규정한다. 어떻게 되어야 겠다는 목적도 목표도 없이, 그 사람이 누구여야 한다는 의식조차 없이 던져진 사랑, 빠져든 사랑. 규범과 관습이 제시하는 설계도와 계획에 얽매이지 않고 그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가는 사랑.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기투(企投)하는 사랑.
영화 <연애의 목적>을 연출했던 한재각 감독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연애에 목적이란 없다. 즐거운 시간이 쌓여가는 것, 그게 바로 연애다."
물론 처음에는 실존적이라 해도 그 사랑이 끝까지 실존적이기는 힘들 것이다. 가장 쉽게는 결혼이라는 목적에서부터 집착의 충족에 이르기까지, 실존적인 방식의 텅빈 공백을 메워야 한다는 조바심을 끝끝내 버리기 힘들 것이므로...
버트란드 러셀은 행복에 이르는 사랑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심은 사랑의 일종이다. 인간에 대해서 따뜻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소유하기를 원하며, 언제나 명확한 반응이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랑과는 전혀 다르다. 이런 사랑은 불행의 원천이 되는 경우가 많다.
행복을 가져오는 사랑은 다른 사람을 관찰하기를 좋아하고 개인들의 특성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랑이며, 만나는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거나 열광적인 찬사를 받아내려고 하는 대신, 그들의 관심과 기쁨의 폭을 넓혀주려고 하는 사랑이다. 이런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원천이 될 것이며, 그 대가로 친절을 되돌려 받을 것이다.
[행복의 정복, 버트런드 러셀]
종종 우리는 조바심과 소유욕 때문에 행복의 원천이 될 사랑을 불행의 씨앗으로 퇴락시키곤 한다.
저자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언급하며 자신이 겪은 실존적인 사랑의 기억을 풀어낸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예컨대 지우개는 애초부터 뭔가 지우기 위한 물건이라는 목적을 갖고 만들어지며, 그 목적에 부합하는 기능과 특징을 가지게끔 설계되어진다. 이런 사물을 우리는 존재라 칭한다.
반면 목적도 목표도 없이, 따라서 치밀한 설계 없이 세상에 던져지는 인간 존재는 그야말로 실존적이다. 조물주가 부여한 소명과 그의 설계를 신봉하는 종교인들의 견해는 이와 궤를 달리하겠지만, 어쨌건 사르트르에게 실존은 텅빈 자유와 주체성을 핵심으로 한다. 아무 목적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인간 실존에 대한 통찰은 하이데거의 피투(被投) 개념과 맥락을 같이 한다.
어쨌거나 사르트르의 실존을 바탕으로 저자는 자신이 경험했던 사랑을 '실존주의적인 사랑'으로 규정한다. 어떻게 되어야 겠다는 목적도 목표도 없이, 그 사람이 누구여야 한다는 의식조차 없이 던져진 사랑, 빠져든 사랑. 규범과 관습이 제시하는 설계도와 계획에 얽매이지 않고 그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가는 사랑.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기투(企投)하는 사랑.
영화 <연애의 목적>을 연출했던 한재각 감독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연애에 목적이란 없다. 즐거운 시간이 쌓여가는 것, 그게 바로 연애다."
물론 처음에는 실존적이라 해도 그 사랑이 끝까지 실존적이기는 힘들 것이다. 가장 쉽게는 결혼이라는 목적에서부터 집착의 충족에 이르기까지, 실존적인 방식의 텅빈 공백을 메워야 한다는 조바심을 끝끝내 버리기 힘들 것이므로...
버트란드 러셀은 행복에 이르는 사랑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심은 사랑의 일종이다. 인간에 대해서 따뜻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소유하기를 원하며, 언제나 명확한 반응이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랑과는 전혀 다르다. 이런 사랑은 불행의 원천이 되는 경우가 많다.
행복을 가져오는 사랑은 다른 사람을 관찰하기를 좋아하고 개인들의 특성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랑이며, 만나는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거나 열광적인 찬사를 받아내려고 하는 대신, 그들의 관심과 기쁨의 폭을 넓혀주려고 하는 사랑이다. 이런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원천이 될 것이며, 그 대가로 친절을 되돌려 받을 것이다.
[행복의 정복, 버트런드 러셀]
종종 우리는 조바심과 소유욕 때문에 행복의 원천이 될 사랑을 불행의 씨앗으로 퇴락시키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