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구경'에 해당되는 글 1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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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5/28 마스터즈, 오거스타 내셔널... 그리고 바비 존스라는 사내
- 2005/07/18 "인생은 아름다워", 레온 트로츠키 (1)
- 2005/01/06 몹시 궁금하다... 그가 미국에 간 까닭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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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9/13 당신의 생을 이끄는 계기는 무엇인가
- 2004/08/25 윤태곤, 'peyo와 molot 사이에서' (2)
암튼 녀석의 미니홈피는 썰렁해져 있었고 녀석은 박사 논자시를 통과한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파악한 후 나가려는데 '다이어리'라는 탭이 눈에 띄었다.
보통 다이어리는 닫아두기 마련이라 별 기대 없니 클릭했는데 이게 웬걸 글이 빼곡하다.
과잉된 의식의 흐름이 여과없이 표출된... 여고생 다운 글들... 녀석 힘들었나 보군... 이라 첨엔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소설이다. 30여편의 토막글이 한 편의 소설을 구성하고 있었고, 녀석은 번듯이 그 마지막에 작가의 변에 갈음하는 에필로그까지 남겨두었다. 에드가 앨런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가 떠올랐다. 소설의 내용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다이어리 코너에 버젓히 자신의 처녀작을 공개해 놓아 오히려 남들의 주목을 피해가는... 녀석의 대담함... 허를 찔린 기분이 잠시 들 정도였다.
내용을 보자면, 인연에 대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묶는 끈이라는 표상에 대한 관념적인 소설이다. 플롯은 교차식이다. 두 주인공의 이야기가 따로 떨어져 있다가 종국에 만난다. 공지영의 우행시를 생각하면 된다.
미니홈피에 끄적거린 글 치고는 그 철학적 사유의 깊이에 한 번 놀랐고, 스토리를 밀고 나가는 녀석의 능란한 솜씨에 두 번 놀랐다. 아마추어 답지 않은 문장의 매끄러움에서는 카운터 펀치를 맞았고.
대학시절부터 공돌이라고 놀려댔고 요즘에도 은연중에 책만 파느라 재미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을 거라 여겨 온 나로서는 정말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녀석은 그야말로 농밀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먼 타지에서 외로움과 씨름하고, 촘촘한 강의시간표와 산더미같은 과제에 짓눌릴 것 같으면서도... 녀석은 예전부터 견지해 온 그 무언가를 끈질기게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잠시 부끄러웠다.
결국 애초의 목표, 녀석이 방학을 맞아 귀국을 하는 지 마는 지 여부는 파악을 못했지만... 녀석이 온다면 예전처럼 여럿이 함께하는 자리에서 적당한 이야기로 적당히 좋은 분위기에서 적당히 알맞은 만큼의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진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거기에 와인이 빠지면 안되겠지... 녀석의 소설을 안주삼아 오래 이야기 나누고 싶다.
이 마스터즈 대회가 열리는 장소는 처음부터 줄곧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이다. 조지아 주 아틀란타에서 자동차로 4시간 거리에 자리한 유서 깊은 명문 클럽인 오거스타 내셔널은 마스터즈를 위해 존재하는 클럽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최상의 대회 컨디션을 위해 몇 달 씩 클럽을 폐쇄하고 수시로 코스 레이아웃을 바꾸고는 한다니 말이다.
오거스타 내셔널을 건립하고 마스터즈 대회를 창설한 인물이 사실은 오늘 얘기의 주인공인 셈인데... 소개가 늦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바비 존스(Bobby Jones).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골퍼인데 무엇보다 그는 끝까지 아마추어로 남았다. 물론 그가 활약했던 시대에는 프로선수의 존재감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다해도 모든 상금을 포기해가며 아마추어로 남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바비 존스는 그랜드 슬램이라는 역사적인 위업을 달성한 최초의 골퍼였고 그 목표를 달성한 후 곧바로 은퇴를 선언했다.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평생 그를 따라다닌 아틀란타 지역신문의 기자인 O.B 킬러가 은퇴한 바비에게 이렇게 묻는다. "자네는 우리를 위해 위대한 업적을 세웠고, 어머니를 위해 하버드에서 문학학위를 땄으며, 아버지를 위해서 변호사가 됐지. 그리고 이제 아내를 위해 은퇴를 했네... 그런데 자네 자신을 위해서는 무얼 할건가?"
바비는 대답 대신 아틀란타의 황무지를 보여준다. 그 자신을 위해 여기에 골프클럽을 만들고 오거스타라 칭할 것이라며... 1932년의 일이다.
바비 존스가 정말로 그 이후 자신을 위해 삶을 살았는지, 오거스타를 통해 얼마만큼의 만족을 경험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허나 분명한 것은 그가 골프역사에 전무후무한 족적을 남긴 아마추어 골퍼이며 자기 목표와 세상의 기대 그리고 가족의 행복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그 모두를 조화롭게 이어갔다는 점이다. 그게 부럽고 또 존경스럽다.
최초의 사진 에이전시 매그넘 창립 삼인방 가운데 한명인 로버트 카파는 1932년 스탈린에 의해 축출돼 망명길에 오른 트로츠키를 대타로 취재했는데 그것이 엄청난 특종이 됐다. 이후 세계외교무대에서 그는 사진기자로서 명성을 날렸다.
멕시코의 민중화가 디에고 리베라는 범세계적인 왕따로 인해 갈 곳 없었던 트로츠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했다고 한다. 그리고 트로츠키는 (배은망덕하게도)그의 동거녀였던 프리다 칼로와 연애를 했다고 전해진다.
트로츠키로 유추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작품들도 많다.
항간에는 Peyo의 만화 스머프에 등장하는 똘똘이를 트로트키라 지목하는 글이 나돌기도 했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가슴 아픈 우화인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선 스노볼이라는 돼지로 등장한다.
무엇보다 뜻 밖의 연결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가 트로츠키의 유언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스탈린이 보낸 자객의 도끼에 맞아 죽기 전 트로츠키는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했단다. 다음은 그가 남긴 유언장 내용. 읽고 나니 서글픔과 서늘함, 안타까움과 뜨거움 등 온갖 감정이 교차한다. 그 실체가 무언지는 도대체 모르겠다.
의식을 깨친 이래 43년의 생애를 나는 혁명가로 살아왔다. 특히 그 중 42년 동안은 마르크스주의의 기치 아래 투쟁해 왔다. 내가 다시 새로이 시작할 수만 있다면 이런저런 실수들을 피하려고 노력할 것은 물론이지만, 내 인생의 큰 줄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요, 마르크스주의자이며, 변증법적 유물론자다. 결국 나는 화해할 수 없는 무신론자로 죽을 것이다. 인류의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내 신념은 조금도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오늘날 그것은 내 젊은 시절보다 더욱 확고해졌다.
방금 전 나타샤가 마당을 질러와 창문을 활짝 열어주었기에, 공기가 훨씬 자유롭게 내 방안을 들어오게 됐다. 벽 아래로 빛나는 연초록 잔디밭과 벽 위로는 투명하게 푸른 하늘, 그리고 모든 것을 비추는 햇살이 보인다.
인생은 아름다워!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
1940년 2월 27일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레온 트로츠키
자신이 고발했던 건설사(방송국을 소유하고 있는 그 건설사 말이다) 사장으로부터 거나한 식사대접과 함께 구찌 핸드백을 받았는데, 번민하다가 결국 돌려줬다는 내용이다.
이상호 기자의 확고한 직업윤리가 잘 드러난 에피소드라 생각된다. 그러나 정작 내 관심을 끈 건 다른 쪽이다. 그의 글에 나오는 미국 출장 건(아래 박스 참조).
어떤 취재길래 그를 저토론 비장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간의 화려했던 고발과 폭로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라니... 얼마나 대단한 것이길래...
그리고 이런 의문이 들었다.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이상호 기자는 아래의 글을 올린 지 하루만에 지웠다고 했는데, 그것은 구찌핸드백 때문이 아니라 두렵다고 까지 한 미국 취재껀 때문이 아니었을까?
취재대상 기업(이 기자는 자본이라 표현)이 낌새를 챌까 두려워 지운 게 아니냐는 말이다.
그런데 한겨레가 이처럼 보도해도 되는건가? 이 기자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면 그가 미국에서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을텐데...
이 기자 스스로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지 않는가:
나의 출장계획이 누군가에게 알려질 경우, 나는 이곳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음을 안다. 그리고 각오한다.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은 자본의 심장에 도덕성의 창을 꽂는 일. 이를 위해 기자는 어쩌면 목숨 보다 소중한 것을 걸어야할 수도 있다.
궁금증은 이번 취재의 주제로 이어진다... 뭘까?
칼라힐과 같은 거대군산금융복합체의 본질을 파헤치는 것?
론스타와 같은 국제투기자본의 더러운 이면?
그게 아니면 혹 현대, 삼성, SK와 같은 국내 거대자본의 부패와 비리?
뭐가 됐건 매우 궁금한 건 매한가지다 빨리 결과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상호 기자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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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찌’ 파문 이상호 기자 석연치 않다
from 서명덕기자의 '人터넷세상'2005/01/08 11:59MBC현직 기자가 100만원짜리 ‘구찌’ 핸드백을 받아 파문이 일어난 사건을 알고 계십니까? 사건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노컷뉴스 보도에 따르면 지난 12월 24일 MBC 강성주 보도국장과 MBC '신강균
경과는 이렇다. 어제 포스팅한 '스타라이브러리...'를 보고 '펭도'님이 코멘트를 남겼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그의 블로그를 찾았고, 몇 개의 포스트를 눈팅하던 중 '문혁상'이라는 이름을 보게 됐다. --MORE--
흔치 않은 이름... 링크를 따라 또 다시 그의 블로그를 방문했고, 사진 한 장 보지 않고도 그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독특한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그의 블로그...
고등학교 동창인 녀석은 그때도 얼리어답터적인 기질을 갖고 있었다.
내 기억엔 디오라마며, 대중적이지 않은 팝가수의 앨범 등 많은 화제를 가진 녀석이었다.
서로 다른 대학을 가고 한참을 만나지 못하다가 다시 마주친 건
몇 해 전 삼성동 인터콘티넨탈 호텔 앞에서 였다. 문과로 진학한 녀석은 네트워크 자격증 취득을 위해 공부 중이라고 했다. 내 결혼식 때는 외국에 있으면서도 선물을 보내주기도 했다. 대부분의 얼리어답터가 그렇듯 자기방어적인 새침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알고 보면 마음이 따뜻한 ㅋㅋㅋ (내게 뭔가 선물하면 이 정도 립서비스는 받을 수 있다^^V)
여하튼 블로그(네트워크)는 새삼 대견하다. 무언가 발언하면 새로운 끈이 생겨나고 인연이 싹튼다. 멋지지 않은가?
(우리의 조우에 대한 문혁상의 글에 대한 트랙백)
뿐만 아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뱉고야 마는 집요함도 둘 사이를 엮어주는 공통분모다.
그들이 자기 나름의 숭고한 어떤 책임감에 의해 입을 여는 순간 다른 사람들의 기분이나 회의의 목적 따위는 간단히 무시된다.
오늘 회의에서는 더 나아가 그 둘이 맞붙은, 보기 드문 장면이 연출되기까지 했다. 추석 아이템 보강을 논하는 자리에서 느닷없이 기업도시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튀어 나오더니 이내 내수침체에 허덕이는 한국경제와 정권의 통치철학까지 회의석상에 불려와야 했다. 둘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어색하고 지루한 침묵이 그들의 열띤 논쟁과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대조를 이루며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더니,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누군가의 중재가 있고나서야 그들만의 논쟁은 종결될 수 있었다(맙소사!). 그러나 이미 조질대로 조져진 분위기는 회복이 요원한 상태였고, 정작 논의해야할 안건들은 결국 서둘러 처리돼 버리고 말았다(탕탕탕!).
사실 그들 둘은 많은 부분 서로 닮았기 때문에 꽤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그런 둘이 맞붙었으니 내심 관심이 가기도 했다. 과연 누가 이길까 하는 궁금증이 나도 모르게 솟구칠 정도였으니 말다. 보통 그들 각각이 다른 누군가와 언쟁을 벌일 경우 결과는 거의 예외없이 동일한 양상을 보인다. 진이 빠질대로 빠진 상대방이 알아서 물러가는 형국인 것이다. 그게 싫었던 나는 끝까지 가보리라 전의를 불태우며 한바탕 소란을 벌이기까지 했으나 결국 마음의 상처만 잔뜩 떠안은 채 패잔병처럼 물러나고 말았다.
토론 도중 상대방의 말을 끊는 것도 둘 사이의 공통점이고, 상대 주장의 논점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상대 주장을 전혀 다른 무언가로 바꿔 버리는 무례함(무지함?) 또한 무척이나 닮았다. 그렇다고 해서 비록 아집과 독단이 흠이긴해도 그들이 남다르게 일관된 소신과 굳건한 자기 철학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와 비슷하거나 약해보이는 사람들에겐 똥고집을 세우는데 반해 이른바 명사급 인사들에겐 한없이 약하고 너그럽고, 거기에 더해 귀까지 얇아져 버린다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사람들을 만날 땐 귀에 대못을 박아 놓고 있으면서 명사나 전문가로 대접받는 이들을 만날 땐 외이도에 음성증폭기라도 달고 가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 혼신의 힘을 다해 지키려 하는 자기 주장, 그 숭고한 아집과 독단은 시도 때도 없이 변하기 일쑤다.
예컨대 두 사람 중 한명(여성이다)은 자신이 페미니스트인양 행동하길 좋아하면서도 저항적 페미니스트들은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어느 날 전여옥 여사를 만나고 오더니 전 여사야말로 진정한 페미니스트라고 치켜 세우는 것 아닌가. 참으로 독특한 페미니즘이 아닌가? 당시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던 나는 그것의 허구성을 깨주려는 무모한 호혜주의적 행동을 했다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비슷한 수준의교육을 받은 사람의 대화가 이 정도로 엇나갈 수도 있구나 하는, 언어학적 경이로움에 압도돼 애초의 목표를 접어야 했다.
뭐 여기까지는 좀 빈곤하긴 하지만 일관성은 있는 페미니스트('테러리스트가 되자'는 전 여사의 교시를 충실히 이행하는)의 등장 쯤으로 가볍게 넘길 수 있다. 헌데 문제는 이 여성이 총선을 앞두고 느닷없이 민주당 지지를 선언하는 게 아닌가. 이유 따위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해가 안되는 정보는 기억도 어려운 법이다.
기행적인 포지션 이동은 요즘도 계속된다. 김희선 의원과 조선일보의 싸움을 '아버지 성(姓)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가부장적인 김 의원 탓'으로 돌리질 않나, 민노당은 싫다면서도 민생운동본부 활동에 대해선 지극히 오바하는 공감대를 드러내질 않나... 그 현란한 스텝에 제대로 보조를 맞추다간 관절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다.
그 남자(또 다른 한 명)는 그래도 주장의 정교함이나 일관성을 꽤 갖추고 있다(여자에 비해). 문제는 자기 주장에 스스로 도취돼 분별력을 잃는다는 데 있다. 자기 주장을 무리하게 외화시키려는 욕심에 그는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스트레스에 휩싸이곤 한다. 혼자만 고초를 겪으면 좋을 텐데, 그 과도한 스트레스를 주장에 공감하지 못하는 남과 함께 나누려는 데서 문제는 발생한다. 그것도 아주 폭력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그를 볼 때마다 나는 근대성이 빚어낸 우울한 인간상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자아에 대한 맹신적 집착으로 인해 한번 어느 생각에 꽂히게 되면 다른 모든 것을 도구화해 버린다. 타자의 인격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당면한 자기 과제 해결을 위해서만 '남'을 사고한다. 이런 자들이 구제불능인 것은 스스로 굉장히 도덕적이고 성실하며 우월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것에 기대 타인에게 행하는 폭력을 정당화 하는 데 있다. 이 불행한 영혼을 어쩔텐가... 처음엔 맞서고 화내는 것으로 반응했지만, 이제는 그저 안쓰러움만 남았다. 나야 이제 안 보면 그만이지만, 그와 그의 가족들은 평생 그 짐을 안고 가야할 것 아닌가.
여기까지 읽어 보니 애초 의도와 달리 상당히 살풍경한 글이 돼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어쩔건가 사실 저들의 엽기성에 대해 절반의 절반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어찌됐는 이제 저들과 마주칠 일 없다는 사실이 그간 적잖이 놀라고 상처입었던 스스로를 위무해 주면서도 또 어딘가에서 비슷한 부류를 맞딱뜨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찔해지기도 한다.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아이 키우는 애비 입장에선 상당히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고 그 답을 알게 된다면 반면교사로 삼아야 겠다.
최근의 내 삶은 자중자애(自重自愛)를 기조로 유유자적(悠悠自適)을 향해가는 중이다.
나와 내 주변부터 즐거워야 이 세상을 즐거운 공간으로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참으로 나이브한 생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기형도의 시에서 따온 다음 구절, 그리고 연초에 읽은 고미숙의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등이 나의 이런 생각에 나름의 명분을 제공해 줬다. ('대의'라는 말은 차마 가져오지 못하겠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과거에 비해 한결 느슨해진 내 삶의 전략과 별개로 나는 여전히도 치열한 정공법을 택한 이들을 사랑한다. 그들의 꿈과 힘을 느낄 때 가슴 한 구석에서 뭉클함마저 솟구친다.--MORE--
6개월여 전 고준성이라는 사람을 우연히 알게 됐다. 그리고 최근 블로그코리아를 통한 또 한번의 우연으로 그의 블로그도 찾게 됐다. 같이 일하고싶다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되진 못하더라도 함께 술잔을 기울여 보고픈 사람이다. 아래 리영희 선생의 글은 그의 블로그에서 따온 글이다. 그는 이 글을 '결정과 영향'이라는 자신의 글에 덧붙였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다음과 같은 경구도 함께...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노신(魯迅)과 나 / 리영희
나는 가끔 내 삶의 내용과 방향과 목적을 결정지어준 외부적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결정’은 아니었더라도 크게 ‘영향’을 준 일들에 관해서다. 내가 걸어온 삶이 다소 치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궁금해서 묻는 것이다. 나 자신은 내 삶이 각별히 ‘치열’했다거나 지금 치열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평안하고 순탄한 삶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다. 몸과 마음이 편안할 수 있었는데도 그 길을 택하지 않았고, 흔한 말로 부귀영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약간의 ‘권세’와 부족 없는 생활 정도는 누릴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것을 마다하고 살아온 것은 사실이다.
변변치는 않지만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리승만, 박정희, 전두환 3대에 걸친 30년간의 지식인으로서의 삶에서 형무소 생활 세 번, 그것들을 합쳐서 체포·구속·연행 등 권력기관의 직접적 신세를 아홉 번이나 졌다. 같은 이유로 언론기관에서 두 번, 대학에서 두 번 쫓겨났다. 나의 주관적 판단이야 어떻건, 뭇사람들의 눈에 다소 ‘치열한 삶’이라고 비친 면이 있다면 그런 사실 때문인 성싶다. 조금은 그런 면이 없지도 않다.
한 인간의 삶의 내용·방향·목적에 작용한(작용하는) 요소와 요인은 많을 것이다. 심지어는 유전학적 요인부터 출신계층, 가정조건과 환경에서 우연(偶然)에 이르기까지. 그런 요소들과는 별도로, 하나의 지식인이 되는 과정에서 삶의 질에 영향을 주는 것들도 중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나에게는 분명히 중요한 흔적을 남긴 분이 있다. 그는 현대 중국 작가이자 사상가인 노신(魯迅)이다. 노신은 사상을 문학의 형태로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실천으로 행동화한, 흔치 않은 지식인 중의 한 분이다.
젊은 시절의 누구나 그렇듯이 정신적·사상적 모색으로 고민하던 나는, 노신의 많은 저서를 읽으면서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에 감동했다. 단순히 지식을 상품으로 파는 것에 안주하는 교수나 기술자나 문예인이 아니라, 부정한 인위적·사회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고난 받는 이웃과 고난을 바꾸어 보려는 지식인의 사회적 의무에 눈을 뜬 것이다. 그 소명감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싹튼 것임은 물론이다.
종교는 ‘인간고’(人間苦)를 신(神)의 섭리와 인간의 운명적 차원으로 해석하여 개인적 및 관념적 구제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노신은 무신론자인 까닭에 인간고를 역사적·사회적 조건으로 보고 사회적 개혁을 통한 인간애의 보편적 실현에 그의 지식을 쏟았다. 그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으로 문학형식을 택하고, 작품을 통하여 중국사회의 착취·억압·타락·몽매…를 고발하였다.
무신론자인 나는 그의 철학과 사상과 방법론에 공감하였다. 1950년대 말에 중국어 저서(작품)를 사전을 찾아가며 힘겹게 읽어가던 어느 날 가슴에 와 닿는 한 구절에 마주쳤다.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가령 말일세, 강철로 된 방이 있다고 하자. 창문은 하나도 없고 여간해서 부술 수도 없는 거야. 안에는 많은 사람이 숨이 막힌 채 깊이 잠들어 있어. 오래잖아 괴로워하며 죽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혼수상태이기 때문에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에 놓여 있으면서도 죽음의 비애를 느끼지 못한다.
이때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서, 그들 중에서 다소 의식이 또렷한 몇 사람을 깨워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불행한 이 몇 사람에게 살아날 가망도 없는 임종의 고통만을 주게 될 것인데, 그래도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도 몇 사람이 정신을 차린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대담형식의 이 구절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중국의 군벌통치와 장개석(蔣介石) 총통 시대의 중국사회를 풍자한 글이다.
모든 면에서 군벌지배와 장개석 치하 중국을 방불케 했던 박정희 대통령 치하에서 고민하던 나는 이 구절을 읽는 순간 그 구절은 무덤에서 노신이 나에게 타이르는 소리같이 들렸다. 나는 눈을 뜨고 정신을 번쩍 차렸다. 나는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맹목적이고 광신적이며 비이성적인 극우·반공주의에 마취되어 있는 사람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여 의식을 바로잡아주는 일이 나의 삶의 전부가 되었다.
‘그런 임무는 30대 초기의 한 젊은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생각은 세상을 모르는 철부지의 교만이거나, 이른바 소아병적 영웅주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뒤 노신은 무덤 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격려하고 또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있는 사람들을 흔들어보고, 소리를 지르고, 철로 된 방의 벽을 두들기다 주먹에서 피가 흐르면 온몸으로 부딪쳤다. 온몸에서 피가 흘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면 내가 있는 곳은 형무소라는 철로 된 감방이었다. 0.11평 크기의 관 속 같은 그 철방에 있는 것은 나 혼자였지만, 그런 관 속에 들어있는 학생·노동자·지식인은 전국에 수백, 수천 명이었다. 그들 중의 적지 않은 수가 나의 몸부림으로 잠을 깼고, 그리고 나와 같은 정신으로 그들의 이웃의 잠을 깨고 그러다가 철방 속에 갇히게 된 것이다. 해마다 그 수는 늘어났다. 그들이 철방에서 나가면, 그들에 의해서 잠을 깬 학생·노동자·지식인이 또 몇백 몇천 몇만 명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 절차가 영원일 듯이 되풀이되고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힘없는 나와 그들의 주먹과 몸에서 흐른 피는 헛되지 않았다는 흔적이 차츰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원할 것으로 믿고 스스로 쌓아올렸던 외세추종자 리승만의 동상이 땅바닥에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뒷자리에 들어앉아 히틀러의 2세를 자부하고 종생 총통 왕국을 꿈꾸던 간교한 전제군주 박정희가 자기 부하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리승만과 박정희의 대를 이어 제3의 장개석이 되려 했던 전두환도 성난 민중에 의해서 쫓겨나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철로 된 방에는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은 아직 사람이 빠져나갈 만한 크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숨을 쉬고, 빛을 보고, 주먹이 나갈 만한 크기는 되었다.
내가 몇 사람의 잠을 깨우고 몇 사람의 의식을 깨우쳤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노신처럼 ‘역사’를 밀고 갈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한 ‘시대’와 함께 살아왔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30년 전 나의 의식의 눈을 뜨게 해준 노신에 대한 조그마한 답례를 한 셈이다. (역사춘추 1988년 7월호, <동굴 속의 독백>에서 재인용, 고준성의 블로그에서 재인용-evo)
윤태곤이 진보넷 참세상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진보 블로거로 활동 또한 개시했단다.
기자 아이디는 peyo고 진보블로그 아이디는 molot, 블로그 주소는 Profintern이란다.
윤씨의 분열적 자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자는 한 때 '세헤라자데', '루이'를 최근에는 문제의 아이디 '으허허'를 쓰기도 했다)
아이디에 대한 해설은 다음과 같다.
알다시피 peyo는 개구장이 스머프를 그린 프랑스 만화가 이름. 지금에사 스머프의 문제점이 몇가지 제기되고 있지만(여성에 대한 몰이해-스머페트- 라던가 똘똘이를 통한 트로츠키의 희화화등등) 개구장이 스머프는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빨간 감성을 쉽고 재밌게 심어주는데 혁혁한 공헌을 한 만화가 아니던가! 따라서 나도 직접적인 방법이 아니라 은근슬쩍 세상을 빨갛게 물들이는데 이바지 하겠노라는 마음으로 Peyo로 이름을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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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렇다면 molot는 무슨 뜻이란 말이던가?? 소비에트를 들었다 놓았다 하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은 본명이 아니다. 몰로토프 또한 마찬가지다. 레온은 사자, 스탈린은 강철에서 따온 말이고 몰로토프는 망치를 의미하는 몰로트에서 따온 이름. 이 블로그에선 공식적 기사와 달리 그냥 망치로 짜증나는것 뽀개듯이 글을 쓰겠다는 의미로 몰로트로 별명을 정했다.
주소는 왜 프로핀테른인가? 할아버지가 적색농조, 협의회 활동하던 30년대에 조공재건 일환으로 지역조직 건설에 매진하라는 택이 코민테른, 프로핀테를에서 내려왔다지. 지금 생각하면 참 놀랍기 짝이 없다. 모스크바 택에 따라서 경북 칠곡에서 백여명이 움직였다니....
하여튼 프로핀테른의 정식 명칭은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 (赤色勞動組合- Red International of Labour Unions) ...요즘 시각에서 보면 참 촌스럽고 스탈린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름이자 조직이긴 하다. 그러나 프로핀테른은 개량의 대명사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모임이 아니던가?
이 자가 지닌 사고의 번잡성을 엿 볼 수 있다... 인간아 단순하게 살아라 ㅋㅋ
(블로그 개통과 함께 윤씨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연재물이 있다. '오늘'이라는 구태의연한 컨셉이다. 내용이 신선할 지는 더 두고 봐야 할 듯. http://blog.jinbo.net/Profintern/?pid=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