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 소비에트가 해체되고 그와 함께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할 당시 이진경은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수감중이었다. 박노해도 이야기했지만 그 당시 사회주의자들에게 이는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이었던가. 그러나 이들은 곧 새로운 전망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 역사적 사회주의 기획의 정당성을 일소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자본주의의 승리와 역사의 종언으로 귀결되는 건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이진경은 그의 말마따나 새로운 지도 그리기에 몰두해 왔다. 그것은 사회주의속에서 녹아들어 있었던 국가주의의 망령을 걸러내는 것이었고, 자본주의와 사이 좋게 공유하고 있었던 근대성이라는 지형 자체를 흔드는 것이었다. 거칠게 말해 사회주의적 기획이 근대성이라는 토대 하에서 진행되는 한 실패는 필연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인식이었고 그래서 그는 '주체생산의 역사이론 정립'에 나선다.
생산양식과 국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바뀐다고 해서 저절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소비에트 사회주의에서 목도한 까닭이었다. 근대성이 대중(주체)의 습속에 뿌리깊게 작용하는 한 사회주의적 생산양식도, 국가도 애초의 기획과 달리 변질될 수 밖에 없다는 걸 간파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그리는 변혁은 생산양식과 국가라는 거대한 층위에서 보다 주체의 습속이라는 미세한 영역으로 내려 오게 된다. 97년 출간한
'맑스주의와 근대성'에서 그는 자신의 새로운 (쿄뮨주의적)기획의 전모를 밝혔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그의 작업은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하다.
쉽게 말해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사람의 사유와 행위를 제한하는 삶의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새로운 사회로 가는 길은 요원하다는 것이었다. 국가와 경제가 아니라 삶의 공간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변혁의 꿈.
각설하고... 뒤늦게 읽게 된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푸른숲, 2000)'은 앞서 언급한 '맑스주의와 근대성'과 비슷한 시기에 나온 책이다. 내가 이번에 읽은 건 2000년에 다시 나온 증보판이다. 사실 이진경은 '맑스주의와 근대성'에서 근대적 노동 체제를 서술하면서 근대적 노동의 성분들로 '시간-기계'와 '공간-기계' 등을 이미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은 이 부분을 좀더 심화해서 엮은 책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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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전반부에선 근대적 시간개념과 시선 그리고 공간구조가 어떻게 형성돼 왔는 지를 역사적으로 고찰한다. 미술작품, 건축물, 사진 등 서양의 근대를 기록한 각종 시각자료가 풍부하게 제시된다. 군데군데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꽤 등장하는 데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사실 근대과학을 상징하는 피사의 사탑에서 갈릴레이의 실험은 하나의 허구적 전설일 뿐인데,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그런 실험에 필요한 정확한 시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시계의 오차는 하루에 1시간 정도였고, 시계에는 분침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 초 이하의 경각을 다투는 실험이 대체 어떻게 가능했을 것인가!" (그림 1-11 호이겐스 '진자시계'에 대한 설명 중)
많은 자료들에 힘입어, 르네상스적 시선과 바로크적 시선의 차이를 다루는 부분 등을 통해 한 시대의 사유와 정신이 동시대 예술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 지 비교적 생생히 살펴 볼 수 있다.
사실 이 책에서 핵심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부분-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시간-기계와 공간-기계 형성의 역사와 그 동학, 이를 넘어서기 위한 실마리-은 뒷부분(5장~7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앞부분의 풍부한(조금은 지루하고 지나치게 동어반복적인) 서술을 통해 근대적 삶의 방식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과학을 비롯한 사유는 어떻게 발전해 왔는 지를 비교적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다.
독서의 즐거움만 따진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핵심적 입론이라 할 수 있는 뒷부분보다 많은 역사적 자료와 근대과학 형성에 대한 설명이 담긴 앞부분이 더 마음에 들었을 정도다.
끝으로 간단히 핵심내용과 저자가 전하는 메시지를 정리해 보고 평가해 보자.
근대의 시간-기계와 공간-기계가 성립된 것은 "사람들의 활동과 행위를 통제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시간-기계는 사람들의 활동을 포섭하고 강제할 뿐만 아니라, 포섭된 사람들의 신체를 통해 내면에 침투한다. 또한 그것은 특정하게 코드화된 행동이라는 양상으로, 혹은 습관(Habitus)이라는 양상으로 신체에 새겨지는 일종의 생체권력이다.(p254)
공간은 역사적으로, 특히 생산양식과 관련된 사회적 산물로서, 공간마다 갖고 있는 나름의 공간적 코드가 공간적 실천을 규정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신체는 이러한 공간적 실천을 통해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신체'요 '공간적 신체'다(앙리 르페브르).
즉, 시간-기계와 공간-기계는 (근대적,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조직하는 선험적인 형식(그 위에서 경험과 지각이 이루어지는)인 것이고 바로 이것 위에서 자본주의는 작동된다. 화폐개념과 결부된 시간은 생산과정의 핵심적인 척도, 나아가 삶과 사회의 척도가 되고 특정한 공간적 배치를 통해 고도의 생산, 교육, 교화 등이 이루어진다.
누가 억지로 등을 떠밀지 않더라고 사람들은 시간-기계에 의해 스스로의 삶을 근면적으로(노동에 최적화해) 관리하고 특정한 공간에서는 그 공간의 규칙에 따라 주어진 역할을 기계적으로 수행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촘촘히 계열화된 시간-기계, 공간-기계를 통한 지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새로운 질서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
저자는 "혁명에서 국가나 생산양식 전체의 전복을 떠올리는 무거운 관념 안에서, 시간-기계 공간-기계를 바꾼다는 것은 국가권력을 바꾸는 것 보다도 더 어려운 것일 수도 있을 것"이지만 "계열화를 통해 연결되는 기계와 배치라는 개념은 전복이나 변환, 아니 심지어 '혁명'에 대해서도 훨씬 쉽고 가벼운 관념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것은 어떤 요소의 추가나 제거, 혹은 연결 관계의 변환을 통해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p311)
이어서 말한다. "자본주의와 자율주의의 차이, 자본주의와 코뮨주의의 차이가 규율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규율과 자율주의적 규율, 자본주의적 규율과 코뮨주의적 규율에 있는 것처럼, 근대적 삶의 방식과 쿄뮨적이고 자율주의적인 삶의 방식의 차이는 선분화된 시간-기계의 유무에 있다기 보다는 그것의 상이한 배치, 상이한 용법에 있는 것이다." (p313)
이 상이한 배치와 용법에 대한 사례로서 프랑스의 기업가 장 밥티스트 고댕이 푸리에의 영향을 받아 건립한 노동자 사택 파밀리스테르를 언급하는데, 이는 중정(집 가운데 설치된 마당, 광장)과 테라스의 공동이용을 통해 개인과 가족의 사적공간과 공적인 공간을 조화시키는 방식으로 건축된 집이었다. 중정과 테라스가 구획화된 공간을 넘어서서 소통과 공유를 가능케 하는 코뮨주의적 공간인 셈이다.(요즘 우리 개인가옥에서 유행처럼 자리하고 있는 중정은 철저히 사적인 공간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반면 예전 우리 전통가옥의 중정은 사랑방 손님들과 집안사람들이 어우러지는 진정한 공적 공간이었다. 여성이 배제됐다는 점이 걸리기는 하지만)
시간-기계의 상이한 용법에 대해서는 별 다른 사례나 구체적 방법 제시가 없는데, 대신 "근대적 시간-기계는 상품과 화폐의 힘이, 혹은 상품화된 노동력, 상품화된 삶이 지속되는 한 화폐적 형식과 결합하여 우리 모두의 삶을 제약하는 조건으로 존속할 것"이라며 상품과 화폐에 종속적인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 필요함을 지적한다.
마지막 장에선 진보개념의 재구성 문제가 다뤄진다. 그가 보기에 진보개념은 근대적 시간개념에 기초해 있다. 직선적이고 누적적인 시간개념, 기원과 목적개념의 변증법을 통해 구성되는 발전개념, 인간학 내지 인간중심주의적 전제, 부분을 통합하고 동질화하면서 확장되는 전체론적 관점.
그리하여 우리의 과제는 진보개념을 근대적 시간개념에서 구해내는 것이다. "이 모두는 근대적 시간개념에서 진보개념을 탈주케 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의 단일하고 선형적인 시간이 아니라 각각의 고유한 리듬을 갖는 복수의 시간성, 각각의 부분을 하나의 전체로 동질화하는 시간성이 아니라 국지적인 이질성이 공존하는 가운데 그것을 넘나드는 변이의 시간성, 역사의 시작과 끝을, 진화라는 과정 전체를 인간이 장악한 인간학적 시간이 아니라 각각의 고유한 변이의 선이 자유롭게 흐를 수 있는 생성의 시간을 통해서."
저자가 명쾌하고 정리는 했지만 실제로 현실이 바뀌는 건 그와 별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국가와 생산양식을 바꾸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지난한 문제일 수 있다. 어디서부터 누구부터 시작할 것인가? 과연 짧은 시간(한 두 세대)내에 그게 의미있는 수준으로 확산될 수 있을 것인가. 경제적 층위의 문제는 그렇다치고 미디어와 교육 바꾸어야 할 게 어디 한두가지인가. 갈 길은 멀다. 그리고 지금도 삶은 계속된다.